
산불이라고 하면 보통 나무와 풀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소방관이 물을 뿌리고, 비가 충분히 내리면 불은 결국 꺼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인도네시아에서는 조금 다른 불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겉으로 불길이 사라져도 땅속에서는 계속 타는 불.
바로 이탄화재(peat fire)입니다.
2026년 9월 현재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와 보르네오의 칼리만탄 지역에서는 대규모 산불과 토지화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NASA도 9월 3일 위성사진을 공개하며 인도네시아가 심각한 가뭄 속에서 지표뿐 아니라 지하에서도 이탄이 연소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9월 9일에는 더 놀라운 수치가 나왔습니다.
9월 1~7일 인도네시아 산불에서 배출된 이산화탄소는 약 1,970만 톤으로 추정됐습니다. 이 기간 세계 산불 CO₂ 배출량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준이었습니다.
도대체 인도네시아의 땅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 먼저, ‘이탄’이 뭘까?
이탄(peat)은 쉽게 말하면 완전히 썩지 않은 식물의 잔해가 오랜 시간 쌓여 만들어진 유기물층입니다.
늪이나 습지처럼 물이 많은 곳에서는 토양 속 산소가 부족합니다.
나뭇잎과 뿌리 같은 식물이 죽더라도 미생물이 이를 완전히 분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식물이 죽는다
↓
물에 잠긴 환경에서 완전히 분해되지 않는다
↓
새로운 식물 잔해가 그 위에 쌓인다
↓
이 과정이 수백~수천 년 반복된다
↓
두꺼운 이탄층이 만들어진다
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탄지는 단순한 흙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식물이 대기에서 흡수했던 탄소가 땅속에 쌓여 있는 거대한 탄소 저장고이기도 합니다.
평소 물에 충분히 젖어 있을 때는 이 탄소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보관됩니다.
문제는 이 땅이 말랐을 때 시작됩니다.
🔥 땅이 마르면 ‘흙’ 자체가 연료가 된다
인도네시아의 이탄지는 원래 습한 생태계입니다.
하지만 가뭄이 심해지거나 농업·플랜테이션 등을 위해 배수로를 만들어 물을 빼내면 이탄층의 수위가 낮아집니다.
그러면 오랫동안 물에 잠겨 있던 유기물이 공기에 노출되면서 건조해집니다.
그리고 충분히 마른 이탄은 놀랍게도 불에 탈 수 있습니다.
즉 일반적인 산불이
나무와 풀 위를 타고 지나가는 불
이라면 이탄화재는
수천 년 동안 식물 잔해가 쌓여 만들어진 땅 자체가 연료가 되는 불
인 셈입니다.
현재 인도네시아 당국도 특히 건조한 이탄지를 다시 적시는 것을 주요 진화 전략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왜 불꽃 없이도 계속 탈까?
이탄화재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훈소(smouldering combustion)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장작불처럼 큰 불꽃을 만들며 빠르게 타는 연소와 조금 다릅니다.
이탄 내부에서는 산소 공급이 제한된 상태에서도 유기물이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타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불꽃은 없음 → 연기만 조금 남음 → 불이 꺼진 것처럼 보임
이라는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아래에서 연소가 계속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산림부 장관도 9월 9일 현재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탄지 화재는 표면에 불꽃이나 연기가 보이지 않더라도 지하의 불이 다시 살아날 수 있어 지속적인 감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게 이탄화재가 무서운 첫 번째 이유입니다.
⬇️ 불은 옆으로만 퍼지는 게 아니다
일반적인 산불에서는 불길이 숲을 따라 이동하는 모습을 눈으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탄화재는 다릅니다.
불이 이탄층 내부로 들어가면 지하의 유기물을 따라 아래쪽과 옆쪽으로 천천히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표에서는 불이 꺼진 것처럼 보이는 장소에서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연기가 올라오거나 불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즉,
겉불을 껐다 = 화재가 끝났다
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NASA 역시 현재 인도네시아 화재 가운데 일부가 이런 저온의 이탄 훈소 때문에 위성에서도 제대로 포착되지 않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물을 많이 뿌리면 되는 것 아닐까?
여기서 이탄화재 진화의 두 번째 문제가 등장합니다.
표면의 나무에 불이 붙었다면 물을 뿌려 온도를 낮추고 연소를 차단하면 됩니다.
하지만 불이 땅속 깊은 이탄층까지 들어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표면에 물을 뿌려도 깊숙한 곳까지 충분한 양의 물이 도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심한 가뭄으로 주변 수위 자체가 낮아져 있다면 진화에 필요한 물을 확보하는 것도 어려워집니다.
실제로 현재 인도네시아는 항공기를 이용한 물 투하와 인공강우뿐 아니라 이탄층을 다시 적시고 지상 진화에 필요한 물을 확보하는 작업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본도 CH-47 헬리콥터 3대와 약 180명의 인력을 보내 진화를 지원할 예정입니다.
결국 이탄화재는 단순히 불 위에 물을 붓는 문제가 아닙니다.
말라버린 습지 자체를 다시 충분히 적셔야 하는 문제에 가깝습니다.
🌧️ 그러면 비가 오면 정말 꺼질까?
충분하고 지속적인 비가 내려 이탄층의 수분과 지하수위가 회복된다면 화재 진화에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짧은 소나기가 한 번 내렸다고 땅속 깊은 곳의 불까지 반드시 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 인도네시아 상황에서도 정부는 9월을 특히 중요한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기상당국 전망상 자연적인 강우 회복이 10월 초까지 늦어질 가능성이 있어, 산림부는 9월을 화재 진압의 결정적인 기간으로 보고 물 투하·인공강우·지상 진화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 이탄화재가 특히 위험한 이유는 ‘연기’다
이탄은 불꽃을 크게 내며 빠르게 타기보다는 오랫동안 훈소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연기와 미세입자, 여러 연소 생성물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 연기는 국경을 모릅니다.
현재 인도네시아 화재에서 발생한 연무는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 등 주변 지역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9월 4일 말레이시아 사라왁의 Serian 지역에서는 대기오염지수(API)가 519까지 치솟아 비상사태가 선포되기도 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API 300 이상은 유해 수준이고 500은 비상사태 선포 기준입니다.
즉 인도네시아의 땅속에서 시작된 불이,
이탄화재 → 대규모 연무 → 국경을 넘어선 대기오염
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 그런데 이 불은 기후변화와도 연결된다
이탄화재가 일반 산불보다 특별히 주목받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탄소입니다.
이탄층은 오랜 세월 동안 식물이 흡수했던 탄소를 땅속에 저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탄이 타면 그 탄소가 다시 대기로 방출됩니다.
즉 원래는
🌿 탄소를 오랫동안 보관하던 땅
이 화재가 발생하는 순간
🔥 대규모 탄소 배출원
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실제로 9월 1~7일 인도네시아 산불의 CO₂ 배출량은 약 1,970만 톤으로 추정됐고, 배출 강도 역시 계절 평균보다 크게 높은 상태입니다.
여기서 좋지 않은 연결고리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고온·가뭄
↓
이탄지 건조
↓
화재 위험 증가
↓
저장돼 있던 탄소 방출
↓
온실가스 증가
↓
장기적으로 더 따뜻한 기후
이런 구조 때문에 이탄화재는 단순한 지역 산불을 넘어 기후 문제로도 다뤄집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는 구분해야 합니다.
🌴 인도네시아 산불은 기후변화 때문에 생긴 걸까?
그렇게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올해 인도네시아의 심각한 화재 위험을 키운 직접적인 자연적 요인 중 하나는 강한 엘니뇨와 그에 따른 가뭄입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도 9월까지 이어지는 건조 조건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활동도 중요합니다.
이탄지를 농업이나 플랜테이션에 이용하기 위해 배수하면 원래 물에 잠겨 있던 이탄이 건조해지고, 토지 개간 과정에서 불이 사용되면 화재 위험이 커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인도네시아의 산불 문제는
엘니뇨·가뭄 + 토지 이용 + 이탄지 배수 + 화재 관리 + 장기적인 기후변화
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단순히
“지구온난화 때문에 인도네시아에 불이 났다.”
라고 설명하면 중요한 원인을 놓치게 됩니다.
🇮🇩 그런데 올해는 왜 이렇게 심각할까?
2026년은 특히 조건이 좋지 않습니다.
현재 화재는 주로 보르네오의 칼리만탄과 수마트라 동부에 집중돼 있고, 9월 초 인도네시아에서는 1만3천 개가 넘는 화재 핫스팟이 관측됐습니다.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인도네시아 정부는 항공기를 동원한 물 투하와 인공강우, 지상 진화 등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기는 이미 인도네시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비상사태가 선포됐고, 동남아 여러 지역이 연무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도 화재철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전문가들은 10월까지 화재와 배출량이 더 증가할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 결국 이탄화재가 무서운 이유
보통의 산불은 눈앞의 불길이 가장 무섭게 보입니다.
하지만 이탄화재에서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불이 더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지표의 불꽃을 껐는데도,
땅 아래에서는 수천 년 동안 쌓인 식물의 흔적이 천천히 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은 다시 지표로 올라오고, 막대한 연기를 만들고, 국경을 넘어 대기질에 영향을 주며, 오랫동안 저장돼 있던 탄소까지 대기로 돌려보냅니다.
그래서 이탄화재를 제대로 막는 방법도 단순히 불을 끄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탄지를 마르지 않게 유지하는 것.
즉 애초에 ‘타기 어려운 습지’로 보존하고 복원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 왜그럴LAB 한 줄 정리
이탄화재가 쉽게 꺼지지 않는 이유는
나무가 아니라 ‘땅 자체’가 타고 있기 때문이다.
수백~수천 년 동안 물속에서 완전히 분해되지 않은 식물들이 쌓여 만들어진 이탄층은 평소에는 거대한 탄소 저장고입니다.
하지만 가뭄과 배수로 인해 이탄이 마르면 그 유기물층 자체가 연료가 됩니다.
그리고 한번 불이 붙으면 땅속에서 천천히 훈소하면서 겉불이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지는 산불이 단순한 ‘숲의 화재’를 넘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참고자료
- NASA Earth Observatory, Peatland Fires Darken Skies in Indonesia, 2026.09.03.
- Reuters, Indonesian wildfire emissions surge to world’s highest, data shows, 2026.09.09.
- Reuters, 인도네시아 산불 진화에 일본 헬기 지원 관련 보도, 2026.09.08.
- Indonesia Ministry of Forestry / ANTARA, 산불·이탄지 대응 현황, 2026.09.09.
- Indonesia Environment Ministry / ANTARA, Kalimantan 이탄지 재습윤·기상조절 대응, 2026.09.05.